인간의 본질과 가치
은퇴 이후, 종종 죽음에 대한 생각이 스친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불길한 징조라기보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죽음이 생각나면 해야 할 일도 떠오른다. “전에 작성해 둔 유언서를 갱신해야 하는데….”, “내가 죽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적어야 하는데….” 생각은 나지만 일상에 밀려 실행하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
오늘은 생각난 김에 미리 사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사후생》을 읽었다. 로스는 임종 환자를 치료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가르치는 주체로 존중하도록 의료계의 인식을 전환한 현대 임종 연구의 선구자였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거나 수집했다고 밝힌 임종 환자와 근사체험자들의 증언, 그리고 자신의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을 소멸이 아니라 다른 존재 상태로의 이동이라고 주장한다.
1. 죽음은 소멸인가, 이동인가
로스는 육체를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고치에 비유한다. 죽음은 나비가 고치를 벗어나듯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 이후 먼저 떠난 가족을 만나고, 빛과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본다.
그러나 이 주장을 의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임사체험은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서 소생한 사람이 보고한 경험이지, 비가역적으로 죽은 이후의 사후체험은 아니다. 심정지 환자의 의식 경험을 연구한 AWARE I·II에서도 높은 곳의 숨겨진 그림이나 태블릿 이미지를 정확히 식별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면담 대상자 숫자가 적어 이 결과만으로 체외이탈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과학은 현재 사후생이 존재한다고 입증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최종적으로 실증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로스의 사후생론은 임종 현장의 관찰과 증언을 영적으로 해석한 체험적·철학적 주장으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그녀는 영혼의 실체를 전제하는 입장이다.
2. 한국인은 왜 이승을 붙잡는가
책 부록에는 번역자 최준식의 「한국인의 죽음관—내세관의 형성을 중심으로」가 실려 있다. 최준식은 전통적 한국인의 죽음관을 저승보다 이승을 중시하는 현세 중심적 죽음관으로 해석한다.
유교는 사후세계를 적극적으로 설명하기보다 현재의 삶과 인간관계, 가족질서를 우선했다. 한국의 다양한 무속 전통은 혼령과 저승을 인정했지만, 통일된 내세 교리보다 한풀이·액막이·무병장수 등 현세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내세에 관한 믿음은 불분명해도 제사와 장례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속된다고 전제한 것이다.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은 이러한 현세 중심성을 압축한다. 물론 기독교·불교·무종교가 공존하는 오늘날 모든 한국인이 같은 죽음관을 가졌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다만 죽음을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보다 익숙한 이승과 가족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상실로 받아들이는 정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로스는 죽음을 다른 존재로의 이동이라고 보았고, 최준식은 한국인의 시선이 저승보다 이승에 머물러 왔다고 해석한다. 두 관점은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에서는 다르지만, 죽음을 통해 현재의 삶과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만난다.
3.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질
사후생의 존재를 확정하지 못하더라도 죽음이 현재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는 재산·지위·지식·성과가 모두 힘을 잃는다. 내가 가진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하나씩 사라질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스스로 활동하지 못하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엄한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치를 활동성과 성취에 맡긴다면 노인·환자·장애인처럼 기능이 약해진 사람의 가치도 함께 낮아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은 능력의 크기나 활동여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근거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 우선순위를 세우는 마지막 스승이다.
4. AI 앞에서도 같은 질문이 시작된다
물론 죽음과 AI는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은 생명 자체의 실존적 한계를 가르치고, AI는 인간의 능력과 역할의 한계를 보여주는 기술 문명적 대변화다. 그러나 둘 다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기능과 성과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다.
AI는 언어 생성·정보 검색·분석·창작 등 한때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여겼던 일을 빠르게 수행한다. 인간은 직업과 전문성뿐 아니라 지적 존재로서의 특별한 지위까지 흔들린다고 느낀다. 여기에서도 같은 질문이 생긴다.
“AI보다 느리고 부족해도 인간은 여전히 가치 있는가?”
죽음은 인간에게 생명의 유한성을 드러내고, AI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두 한계는 인간의 오만함과 우월성을 해체하고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다시 묻게 한다.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로스가 죽음 앞에서 발견한 마지막 가치는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나 역시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성취보다 사랑과 관계, 선택과 책임이는 생각이 든다. AI는 공감하는 언어를 생성하고 돌봄을 지원할 수 있지만, 현재의 AI가 사람처럼 고통을 체험하고 결과에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인격적 주체는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적 가치와 남은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는 일이다. AI앞에서도 그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을 성찰하고, AI에 맡길 것과 인간이 끝까지 책임질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죽음과 AI앞에 정직하게 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보면서, 모두 철학자가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인간됨, 나의 나됨의 가치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제 법적 유언서를 갱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 가족에게 전하는 ‘가치유언’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AI는 어떤 인간으로 남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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