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현실도 보는 자리와 질문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산책을 하다가 물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평지를 흐르는 물과 산비탈을 내려오는 물은 같은 물인데도 모습이 달랐습니다.
한쪽은 천천히 흐르고, 다른 쪽은 바위를 치며 빠르게 내려갑니다.
물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놓인 자리와 주변 조건이 달랐습니다.
그 장면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도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같은 현실을 다르게 보는 것은 아닐까?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루에 두 번 사고를 겪고 나서
얼마 전 나는 하루에 두 번 교통사고를 겪었습니다.
한 번도 흔하지 않은 일을 같은 날 두 번 겪고 나니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하필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 질문에 머물러 있을 때는 사고만 크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질문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음에는 무엇을 더 조심해야 할까?”
사고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바꾸니 보이는 것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억울함과 불편함이 앞에 있었다면, 그다음에는 원인과 나의 행동이 보였습니다.
그때 나는 관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관점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현실을 읽는 방식을 바꾸는 힘일 수 있겠구나.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좋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관점을 바꾸어 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잘못 들으면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실은 손실입니다.
사고는 사고입니다.
잘못은 잘못입니다.
힘든 일을 좋은 일이라고 우길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관점은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 내가 어떤 자리에서 현실을 보고 있는지까지 함께 살펴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잘못했는가?”
라는 질문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놓쳤는가?”
“다른 자리에서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라고 물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사람도 한 자리에서만 보면 다 보이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사람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말 한마디만 보고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를 보고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라고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 관계와 상황을 조금 더 알게 되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을 보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습니다.
한 문장만 떼어 읽으면 저자의 뜻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어떤 질문에서 출발했고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했는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시대와 트렌드를 볼 때도 비슷합니다.
오늘 뉴스 한두 개만 보고 세상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긴 시간의 흐름에서 보면 그것이 하나의 변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읽고,
책을 읽고,
시대를 읽고,
세상을 읽을 때
나는 이제 한 자리에서만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을 보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은 비교적 잘 보입니다.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
배운 지식,
성공과 실패,
사람들과의 관계,
신앙과 가치관이 모두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어떤 사건을 만나면 이런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이렇게 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경험을 현실 그 자체라고 착각하지 않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관점은 세상을 보는 눈이지만 동시에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을 보는 눈이기도 합니다.
질문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집니다
관점은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이 막혔을 때
“왜 안 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가?”
라고도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람과 갈등이 생겼을 때
“왜 저 사람은 저럴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을까?”
라고 물으면 다른 부분이 보일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라고 묻는 것과
“이번 경험에서 다음에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움직입니다.
사실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질문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질문이 달라지면 때때로 전에 보이지 않던 길이 보입니다.
삼찰밸업도 결국 관점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내가 글을 쓰면서 정리해 온 ‘삼찰밸업’도 이 문제와 연결됩니다.
삼찰밸업은 단순히 관점을 넓히는 기술이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삼찰밸업은 삼찰(관찰-성찰-통찰)을 통해 삶과 현실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읽고, 그 통찰을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필터로 해석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세우는 글쓰기와 세상·사람·시대 읽기의 사유 틀입니다.
먼저 사실을 봅니다.
그 사실 앞에서 나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표면적인 현상을 넘어 그 안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여기까지가 삼찰입니다.
그다음에는 그 통찰을 내가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어떻게 보는가?”
바로 그 과정이 내가 말하는 Val-Up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같은 관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사실을 보아도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며, 세계를 바라보는 틀도 다릅니다.
그래서 같은 현실에서도 서로 다른 글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내가 더 자주 묻는 질문
예전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부터 물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질문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한 가지를 더 묻습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서 이 현실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가능하면 한 번 더 묻습니다.
“조금 다른 자리에서 보면 무엇이 새롭게 보일까?”
산책길에서 물을 보며 시작한 생각이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물은 자신이 놓인 지형에 따라 흐릅니다.
사람 역시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한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리를 조금 옮겨 다시 볼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관점의 중요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깊고 넓게 읽을 수 있도록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돌아보는 것.
요즘 나는 그것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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